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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과 낯섦, 그리고 기괴함

김희영

익숙함과 낯섦, 그리고 기괴함

  인간과 다른 동물들의 가장 큰 차이는 거대하고 복잡한 두뇌 발달이다. 이에 따라 인간은 정보를 습득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생각하고 파악하고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인간에게 정보란 생사를 결정하는 중대한 자원이며 사람은 이 자원을 토대로 사회라는 울타리를 형성하고 그 울타리 내에서 다시 정보를 활용하여 서로 경쟁하거나 도우며 살아간다. 그런 인간이 가장 크게 의존하고 있는 정보는 시각이다. 사람이 평소 받아들이는 감각의 약 70~80%가 눈, 즉 시신경이 보내는 정보다. 그만큼 사람에게 시각 정보란 다른 정보보다도 특히나 중요하다. 그 영향인지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진실이라 인정하는 사람도 많다. 눈에 보이는 것만큼 명백한 사실도 없다. 눈에 뻔히 보이는 것의 존재를 굳이 증명하려는 사람은 없다. 반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는 어떻게든 증명해내야 그 존재를 인정받는다. 설령 다른 감각으로 느끼고 있더라 하더라도 말이다. 미생물과 같이 너무 작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와 중력과 같은 수많은 물리 법칙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사람은 정보가 부족하거나 없는 상황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곤 한다. 정보가 곧 생존 수단이니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본능이다. 모르는 사람은 따라가면 안 된다, 처음 가는 장소에 아무 준비 없이 가면 안 된다, 낮보단 밤이 위험하다 등등. 정보 부족으로 생길지 모르는 위협에 대한 경고문은 수도 없이 많다. 특히 밤이 위험하다는 관념은 어두운 만큼 시각 정보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겼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만약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익숙하거나 지극히 상식적인 정보가 부정당한다면 어떻게 될까. 시각예술인 미술은 우리에게 다양한 정보를 전달하고, 우리는 그 정보를 수용하며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미술은 때로는 흔한 것을, 때로는 드문 것을 묘사한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묘사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그렇다면 익숙함과 낯섦이라는 상반되는 두 감정을 동시에 느꼈을 때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는지 역시 미술을 통해서 알 수 있다.


Hieronymus Bosch,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 oil on oak panels, 205.5 cm × 384.9 cm (81 in × 152 in),
Museo del Prado, Madrid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그린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이다. 르네상스 시기 그려진 작품임에도 그로테스크한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20세기에 등장한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이 현란하고 괴팍한 그림의 내용은 지독히 단순하다. 기독교 사상에 입각한 천국과 지옥,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 세상을 보여주며 죄악을 멀리하라는 경고와 교훈을 주는 아주 전형적인 주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그림을 평범하거나 흔한 그림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림이 본 적 없는 생명체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에서 기괴함과 공포, 혐오감을 느끼기도 한다.

  매우 기괴한 그림이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건물로 추정되는 구조물은 구와 기둥 같은 단순한 도형을 합친 모습이며, 지옥의 괴물들은 동물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섞은 형태, 그리고 큼지막하게 인간의 신체 일부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모습이다. 이런 부분만 단편적으로 보자면 매우 익숙한 것들이다. 사람과 동물, 도형의 집합. 말로만 들어서는 아무 문제없게 들린다. 하지만 그것들이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분해되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형태가 아닌 무작위로 섞여 완성된 모습은 전혀 익숙하지 않다. 동물의 머리에는 동물의 몸통이 있는 것이 당연하며, 귀와 같은 사람의 신체 부위 역시 사람의 몸에 붙어있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 마땅한, 인류가 예외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한 지독히 상식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틀렸을 때 큰 괴리감과 공포심을 느낀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정보를 기반으로 생사를 오가며 살아온 생물에게 정보에 오류가 있다는 것은 크나큰 위험이다. 그것이 설령 익숙한 형태를 취하고 있더라도, 아니 익숙한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큰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만약 이 그림의 지옥이 인간과 동물의 합성된 형태나 신체의 특정 부위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이 아닌 전혀 본 적 없는 형태로 그려졌다면 지금 작품을 봤을 때 느낀 감정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느낄 것이다. 물론 그 감정 역시 긍정적인 감정일 가능성은 낮다. 사람은 낯선 것을 볼 때 기본적으로 경계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낯선 것이라 해도 그림 속의 존재는 전혀 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호기심과 새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반면 우리가 아는 익숙한 것이 그려져 있으면, 특히나 그것이 사람의 신체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눈으로 본 것과 연관된 정보를 떠올린 뒤 저도 모르게 감정이입을 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한 두려움을 막연하게 느끼게 돼버린다. 그 예로 거대한 귀를 보자. 일반적인 상황에서 귀가 단독적으로 바닥에 놓여 있는 경우는 없다.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이라면 사고로 인해 귀가 잘리는 등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경우엔 자연스럽게 피라는 존재가 공존한다. 하지만 이 그림에선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은 깨끗한 귀가 놓여있다. 상식에 어긋나며 비자연적인 광경이다. 단순히 귀가 그려진 그림을 본 것만으로 이만큼의 정보를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정보를 부정당한다. 첫째는 귀는 사람의 머리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점, 둘째는 만약 귀가 떨어졌다면 피가 나야 한다는 점. 우리는 귀의 형태를 보고 저도 모르게 이입해 잘린 귀에 대한 공포를 느낄 수 있다. 동시에 피가 나지 않는다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이 두 가지 감정이 합쳐져 기괴함을 느끼게 된다.

  지극히 당연한 정보가 주는 익숙함, 그 정보가 틀렸다는 불안감, 두 사실이 합쳐지며 생기는 모순과 역설. 그것이 바로 기괴함이라는 감정이다. 하지만 이 감상이 과연 나쁜 것일까. 인간은 정보를 바탕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정보를 이용해 새로운 정보를 창조한다. 새로운 것은 낯설 수밖에 없고 우리는 낯선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더 나은 미래와 삶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창조가 필요한 법이다. 당장은 낯설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고 그것을 편리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 기괴함이라는 감정을 부정적으로만 여기지 않는 것은 어떨까. 우리가 느끼는 기괴함은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고 있다는 신호일 테니까.

김희영 hppyh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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